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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발 대전차 장벽공사 회상(일년신수)

海印導師 1 5,974 2018.12.20 18:00

때는 바야흐르 구파발 장벽공사 현장(국방 관련 공사인지라 주체가 국방부였고 현장 감독관이 육군 준장 계급이었다.) 당시 海印은 현대건설 토목기사 직책으로 구파발 장벽 원형 R형 구조물 및 00미터 이상의 철문(당시 군사기밀 사항이라 공개하지 않는다는 각서에 싸인한 기억이 있는데, 약 40여년이 지나서 면책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만?)등 구조물 시공 총책{토목과장이 있었지만, 실제 시공은 海印 소관사항이었다. 왜냐하면, 海印이 전년도(1978년) 철원군 김화면 와소리 소재 철책 앞 장벽공사장의 시공경험이 있었고, 당시 김화 장벽공사의 하자 원인을 직접 목격한 경험담을 기초공사 전, 全 직원회의 時 "모래층인 당 구파발 지역의 기초공사를 설계 변경해서 '파일 공법'으로 시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제안함. 그래서 구파발 장벽은 파일공법위에 설치된 그야말로 강도 8이상의 지진에도 문제없게 설계변경 후 시공함.}으로 펄펄 날리던 시절이었다.

그해 10월 26일 당시 중앙 정보부장 故 김재규 반란 사태가 일어났다. 라디오에서 故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거 소식과 함께 공사감독관 某 준장이 火急하게 왔다 갔다 설치는 모습을 보고나서 "아! 국가적으로 큰일 났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러면 현재 느닷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작금 국방 관련 국민적 불안의식이 고조함을 느끼면서, 최소한 국가에서 서울 변방(구파발과 삼송리에 이중으로 대전차 방벽을 시공함)은 옛날식 전투에 대한 군사적 방어용 지형지물을 최전방과 후방 곳곳에 이미 시공되어 있음을 알려 안도감을 주고자 한다. 물론 대규모 핵전쟁과 땅굴로 침투하는 적에 대한 국군의 방어 전술 문제는 군사 전략적인 것이라 잘 모른다. 아마도 정신 나간 대통령이나 고위직 지도층과 군사 전략 三軍 지휘부가 아니라면, 이미 충분한 대책을 마련했을 것으로 단정하여 추측할 뿐이다.

實로 人生無常이라? 당시를 회상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당년 초 경 入門한 "한일역리학원장"이시고, 당시 중구 필동에 거주하시던 대한민국 易學계의 巨頭 자강 이석영 師父님을 당년 10월경 다시 찾아뵈었다. 海印의 방문이유는 서울대 출신의 남모 건축과장과 어떤 모종의 거사를 계획중, 혹시 성공이냐? 아니면 실패하고 감방이냐?를 질문하러 갔었다. 즉, 그때 자강 사부님을 함께 방문한 현대건설 건축부 소속 남모 과장의 이하 전설같은 이야기를 半信半疑하면서 남과장과 함께 계획한 모종의 거사에 대한 성공이냐? 실패냐?를 질의하기 위함이었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즉, 故 김길동(가명)이 1961년 군사혁명을 앞두고 장안에서 유명한 명리학자인 자강 이석영 사부님 앞에 故 박정희 少將의 사주를 내밀었다. 김길동 曰 "선생님 이분께서 거사를 계획 중인데 성공하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하겠습니까? 자강 사부님께서 그의 사주팔자를 감정 후에 말씀하셨다. "이 분의 거사는 성공할 것이며, 향후 18년 간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죽고 권력을 유지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 을묘년 경, 故 박정희 대통령의 심부름꾼인 某 인사가 자강 이석영 사부님을 찾아 뵈었다.

그 曰 "선생님 또 한 번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자강 사부님 曰, "기미년 말과 경신 신유년 경 북방에서 불과 폭발로 인한 대통령 각하의 신변 위험이 있을 조짐인데, 미리 설치지 말고 이삼 년 기다린 후, 戊午년 己未년부터 대비하세요." 사건이 그렇고 그렇게 진행되어서인지 아닌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몰라도, 左右之間 무오년(1978년)부터 현대판 "千里長城 障壁工事"를 비무장지대 남쪽 155마일 동쪽 끝에서 서쪽 끝 서부 전선까지 산악지대를 제외한 평지와 하천 구거 등에 "對戰車防禦 防壁工事"를 국내 8개 건설회사가 화급(突貫工事)하게 시공했다.

당시 토목기사 직책의 海印은 북한 측 대성산과 오성산이 보이는 중간 철책선 앞 와수리에서 구조물 및 토공 담당기사를 했다. 그런데 북한의 남침이 아닌, 미국 CIA의 공작 관련, 故 김재규의 총체적인 국가위기 상황판단 오판(誤判)으로 인해서 즉, 배신한 부하의 총에 故 박정희 대통령이 歸天世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 당시 그 사건(10.26사태)을 접한 후, 海印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명리학문의 전문가가 되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다.

연이어 계속해서 말한다. 위에 거론한 이유와 함께 海印導師에게 특정 인간 운명 관련 명리학문과 풍수지리학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끌게 한 일과 영향을 끼친 인물과 관련 사건을 기술하여 거론한다.

1. 祖父님{당시 힘이 壯士이자 過客 閑良으로 전국을 유랑하시면서 풍수지리학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증조부님(조부님의 父) 산소를 양북면 소재 조부님 처가댁 山 明堂에 移葬(黃龍負舟穴) 하셨다.} 실제로 믿기 어렵겠지만, 풍수지리학문 穴藏發福論에 의하면, 당 산소를 조부님께서 이장 점유했기 때문에 4대째 海印導師가 誕生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2. 父親{사깃꾼 사돈 사위의 甘言利說에 현혹되어 과수원과 논밭 대농지를 저당잡힌 資金(자금)으로 강원도 원시림 벌목사업 등에 날리고, 부잣집 폐허 된 凶家(경북 경주시 마동 62X번지 소재) 이곳 관련 이야기는 "흉가 거주 경험"에 기술하였다.}이 歸天世하신 후, 위 凶家로 이사한 탓에 양택 관련 풍수지리의 길흉을 海印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實戰을 경험하게 하였다.

3. 명리학문의 사부님이신 자강 이석영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바로 海印에게 특정 개인의 장래에 발생할 운명을 예측할 (故 朴正熙 少將의 거사 성공과 권력유지와 죽음 등 개인적인 인생사 파노라마) 수 있는 명리학문과 주역을 더욱 깊이 탐구할 가치와 명분을 강하게 가질 수 있었다. 1983년 초경 자강 이석영 사부님께서 귀천세 하시고 그의 수제자인 벽천 김석환 선생님이 자강 사부님의 저작권과 학원 운영권을 인계인수하면서, 당초 허가받은 "韓一易理學院"을 "韓國易學敎育學院"으로 개명해서 운영하였다.

4. 海印의 육촌 형제 집안의 凶事(과수원에서 함께 자란 초등학교 한해 후배인 갑오생 한 명은 청년시절부터 술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나이 50도 되기 전에 위장천공 출혈로 귀천세했고, 두살 아래 그의 천성이 착한 동생은 나이 30도 되기 전에 급성 中風을 맞아 현재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의 친 할아버지 산소가 토함산 기슭 陰濕地 아까시아 밭에 모셔져 있었다. 착한 아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취업 준비중에 갑자기 憂患을 당하니까, 무식하고 고집이 센 5촌 당숙모(기해년 중반 경, 귀천세하심)도 항복하여 "천하의 흉당인 종조부 산소를 화장 하는 것이 가족과 가문에 좋겠다"는 海印의 견해를 받아들여 같은 장소를 파묘해본 바, 종조부님의 뼈가 전부 삭아 없어지고 대퇴골 일부만 남아서 그 유골을 일부 흙과 함께 태우고 말았다.

5. 고모님 자녀(2+1)의 凶死(풍수지리 학문상 이와 관련한 산소, 훗날 흉당에 터를 잡은 친 할아버님과 할머니 산소와 부친 산소를 海印이 풍수지리 관련 학문을 배우고 나서, 풍수지리 사부님 남헌 이준기 선생님과 함께 전국에서 그래도 산의 지가가 싼 합천군 소재 某 산을 구입하여 移葬하였다.)를 직접 목격하였고, 이렇게 자신에게 닥친 不運과 주변 친인척에게 닥친 凶事를 겪고난 후, 將次 나와 친인척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단절시키고, 개선하기 위하여 不撤晝夜 大悟覺醒하였고, 迂餘曲折(우여곡절) 긴 여정을 거쳐서 海印導師는 중이 아닌 중이 되었고, 마침내 현재 海印東洋哲學院長 職責을 가지게 되었다.

眞實로 海印은 평생에 걸쳐서 어린시절 원인 모르게 닥친 불운한 사건과 환경(왜 나에게 철없는 시절에 집안이 亡해 추락하는 경험을?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단 말인가? 당신이 의지가 있다면, 당장 눈앞의 저 벼락을 나에게 내려치라!!!고 폭풍우 내려치는 들판을 내달리면서 대답없는 하늘을 향해 목이 텨져라고 외쳤다.)과 주어진 運命을 改善 내지 開拓하기 위하여 온갖 東西洋 哲學思想과 宗敎思想과 戰爭史 등을 공부하고 武術修鍊과 下丹田呼吸法 등을 지속적으로 연마하고 연구하면서 끝내는 運命哲學 분야까지 파고들어, 현재 시점에서 "海印東洋哲學院長"의 직책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海印은 <瞬間을 永遠처럼=생사관련이념문제해결방책> 치열하게 또는 한가하게 인생을 편하게 觀照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끝.

海印導師. 合掌.d57d167dae85f080f39732590f7c7104_1545296207_114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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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海印導師 2018.12.21 17:07
나의 가정사를 잘 알고 있는 조카(누님의 장남. 중랑구 소재 모처 빌딩의 한의원장 漢醫師)가 전화를 했다. 나의 사진 모습이 외할머니의 모습 판박이 그대로란다. ~~~ㅎ~~~그 녀석이 해인동양철학원 홈 페이지를 늦게나마 이제야 보게 되었나 보다.

허긴 이십일 성상의 나이 차이로 인해서 40중반을 넘은 조카를 항상 알라(어린 아이) 취급을 해서 이런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한적이 없었으니까, 잘 몰랐던 치열한 외삼촌의 인생 여정이 신기했을법하다.~~~흠~~~

海印導師.  記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