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亭•李之菡•三問三答•三論•海印導師•김철승●
이하 조선시대 不世出의 天文과 周易 등에 통달한 易術名人 李土亭의 三問三答을 기록하다.
問 : 이 세상에서 제1의 富者(부자)는 누구인가?
答 :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는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다.
問 : 이 세상에서 제1의 貴人(귀인)은 누구인가?
答 :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귀인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다.
問 : 이 세상에서 제일 强(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答 :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다투지 않는 사람이다.
이하 海印導師의 개인적인 판단을 약간 기술한다. 즉, 재물이란 養命之本(양명지본)이다. 다시 말해 命(수명 즉,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근본이다. 곧 재물이 있어야 곡물이나 육류 등 각종 음식물의 재료를 구입할 수 있고, 옷을 구해서 추위를 면할 수 있고, 집을 지어서 야생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있고, 생존에 필요한 각종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운동 에너지 힘을 얻기 위한 휴식할 장소를 확보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재물은 곧 생명과 생존에 직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 인간이나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바로 직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특정개인이 선량하거나 부정한 경제 거래 및 수단으로 아니면 遺業(유업)으로 많은 재물을 보유한다손 할지라도 개인적인 운명이 다하면 끝내는 귀천세할 뿐이므로 재물은 인간의 각종 목적과 大業成就(대업성취)의 유용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권리만 보유하면, 재물 본래의 목적달성에 충족한다고 본다.
대저 천하 중생의 貴賤(귀천)은 무엇인가? 漢字(한자)의 생긴 모양대로 해석하자면, 貴란?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계층 중에서 재물(貝} 위에 군림하면서 각종 용역을 아래로부터 쉽게 또는 무상으로 제공받는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賤(천)이란 역시 큰 재물이 모두 쪼개지고(戔) 헤쳐져서(解) 근 본래의 용도를 온전하게 제공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결국 貴賤(귀천)도 인간의 사회생활에 중요한 재물에 연결되어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에 먼저 표현하기를 "天下(천하)의 財物(재물)은 養命之本(양명지본)이라 정의를 내렸다"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일정한 범위에서 모으는(集) 물상을 길하다고 말하면 흩어지는(散) 물상을 흉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 답변을 이하 거론한다. 즉, 벼슬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보다도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없으므로 일반인의 각종 시기와 질투의 대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재물이나 각종 권리나 이익을 제공하거나 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서 타인이 나를 건드리지 않고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생의 貴(귀)를 타고났다고 逆說(역설)한 것으로 추론한다. 그렇지만 이에 더하여 넉넉한 재물까지 보유할 수 있다면 소위, 富貴(부귀)를 타고 났다고 말한다.
세 번째 질문 强弱(강약)을 따진다. 强(강)이란 생명체든 非(비) 생명체이든 두 종의 물질을 상호 반대 방향에서 충돌시켜서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을 소위 强(굳셀)이라 말하고, 원래의 형상을 지키지 못하고 부수어지거나 원형의 欠缺(흠결)이 생기는 것을 소위 弱(약)이라 표현한다. 그렇지만 강약도 절대적인 이치를 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鐵(철)은 강도(强度)가 최강이지만, 탄소 덩어리인 다이아몬드 드릴로 强鐵(강철)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원리의 적용을 말한다. 강약이란 바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시의적절한 강약의 원만한 상태를 길게 또는 적절한 시기 동안 유지함을 우리는 선호한다. 그래서 각종 무기와 칼로서 상대방과 생사를 겨룰지라도 최후까지 생존할 수 있는 자는 싸움의 결과인 생사를 결정하지 않는 者(자) 다시 말해서, 논쟁하거나 다투어 싸우지 않는 사람이 最强者(최강자)라고 에둘러 比喩的(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론한다.
海印導師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불확정적인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상태를 안정적이고 확정적인 상태를 기대하여 만들려고 노력하는 다수의 공정하고 올바른 사상을 가진 運命家(운명가)를 이해하고 그들의 思考(사고)를 공유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타고난 두뇌와 재능은 뛰어났을지라도, 토정 이지함과 같이 성장 과정에 부친이 당시 몰아친 甲子士禍(갑자사화)의 연루 피해자로 귀양을 갔고, 그 후 早失父母(조실부모)하여서 어려운 성장 과정을 거쳤고, 절친이었던 승정원 사관 安命世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자료인 "시정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일로 인하여 그에 불만을 가진 당시 욕먹은 邪惡(사악)한 權力者(권력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자 不義(불의)한 권력자에 대한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나중에 결혼 후 장인어른 모산수가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당시 충주 지역민이 대거 살해당하자, 그야말로 당시 왕권사회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실망감에 고뇌하였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는 방랑객이 된 奇人(기인) 토정 이지함의 심정을 나는 백번 이해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이라고 말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당년에 일어날 각종 사건과 사고를 미리 사주팔자상의 常數(상수 : 갑기자오 9 • 을경축미 • 8 병신인신 • 7 정임묘유 • 6 무계진술 • 5 巳亥獨之 4 등)를 넣어서 계산 후, 개인적으로 일일이 알려줄 수가 없으므로 간단하게 "비결책자"를 만들어서 누구든지 탄생 년월일을 토정수리 계산식에 집어넣으면 당년의 운세 즉, 주역괘상을 얻을 수 있게 만든 책이 바로 "土亭秘訣(토정비결)"이다. 또한, 특정 개인 "사주팔자"의 연월일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보다도 더욱 간결하게(사주팔자의 구성은 이렇다. 즉, 60갑자 곱하기 12개월 곱하기 60일진 곱하기 12시 = 518,400개의 사주 형국이 나온다. 土亭祕訣(토정비결) 맨 첫 장의 괘상은 "乾爲天(111) 變 天風久"로 시작해서 맨 마지막 장의 "地水師(863) 變 地風升" 까지 총 144 구분 사례로 일 년 신수를 包括的(포괄적 : 일정한 대상이나 현상 따위를 어떤 범위나 한계 안에 모두 끌어넣는 것) 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자 土亭祕訣(토정비결)은 60갑자를 上數(상수)로 정하고 12개월(윤달이 있는 해는 13개월 계산)을 中數(중수)로 정하고 마지막으로 토정비결 책 말미의 조견표(별표)에서 12개월과 출생일에 해당하는 下數(하수)를 찾아서 천하의 중생으로 하여금 숫자 3개를 순서대로 추려내서 토정비결 책자를 이용하여 당년 일 년 신수를 찾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나머지 구체적인 적용의 신수풀이는 다음과 같이 행하면 된다. 즉, 현재 해인동양철원 등 국가기관에 공식적으로 등록을 필(畢)한 철학관이나 철학원 등을 방문하여 새해 일 년 신수를 구체적으로 감정하면 쉽게 해결되리라 내다본다.
또한, 野史(야사)에는 이러한 말도 전한다. 원본 토정비결은 “연월일시”를 모두 참고하여 책을 저술한 바, 이 내용은 지나치게 개인의 일년 신수가 잘 맞아 들어가서 오히려 세간의 백성이 생업 등 주어진 일도 안하고 게을러지며 或者(혹자)는 비관하여 가산을 팔아서 술과 가무로 재산을 탕진하고 오로지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無爲徒食(무위도식)하는 등 토정비결 책의 反社會的(반사회적)인 副作用(부작용)이 발생하자, "李土亭은 연월일을 근거로 하는 현재 전하는 '토정비결'로 내용을 확 줄여서 반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해인도사는 어린 시절 어르신들의 대화 내용을 직접 전해 들었다.
오늘은 옛날 인물 중에서 海印導師와 비슷한 대운의 흐름을 겪은 先代(선대) 哲學者(철학자) 토정 이지함님을 불러내어서 소위 지난날 나의 不世出(불세출 퇴직 당시 최종 계급 : 警監)의 관념과 빗대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천하의 누구든지 간단한 常數式(상수식) 수리를 이용하여 당년의 특정 개인에게 닥치는 운세를 점쳐볼 수 있게 만든 "토정비결"을 현대식으로 달리 표현하여 해석하자면 이렇다.
즉, 토정비결은 잘 모르는 길을 알려주는 "당년에 접할 수 있는 운명의 길을 추측할 수 있는 방법을 알리는 책,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운명 네비게이션"이라고 命名(명명)해도 전혀 遜色(손색)이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설령 네비게이션에서 지시하는 길일지라도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 따른 자신이 이미 습득한 정보를 종합하여 잘 알고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운전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정권이 당해 차량 운전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최상의 모범운전으로 운전할지라도 차량을 안전하게 운행하는 일과 사고를 내는 일도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당해 운전자의 기술과 성격과 습관과 기능과 운전자의 컨디션과 위해를 미칠 재수 없는 사고 운전자를 만나지 않을 運命(운명) 즉, 당일 운수에 달려있다고 본다.
아무쪼록 천하의 중생이 널리 "정법과 팔정도"에 따른 올바르고 선량한 마음가짐으로 안정된 생활권에서 만고의 어머님인 이 땅위에서 千載一遇(천재일우) 아니 永劫(영겁)속에 만난 기회에 단 한 번의 인생을 각자가 타고난 복록을 누리고 재앙과 각종 사고를 피하여 타고난 天壽(천수)를 다하기에 萬全(만전)을 다하시라는 생각에 각자의 분수에 걸맞은 사회생활을 안전한 생활 권역에서 행복한 현생을 영위하시기를 천지신명님(法神佛)과 옥황상제(中天指導者)님과 宇宙(우주)의 法神佛(법신불)님께 축수 염원하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끝
海印導師 合掌.
이하, 나무위키 사전에서 토정 이지함의 생애를 옮겨 적는다. 즉, 117년에 충청도 보령현에서 이치(1477년 ~ 1530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2], 맏형인 이지번(李之蕃)[3]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러나 14세와 16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어 한양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1547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로 죽음을 맞자, 불의의 권력을 혐오하게 되었다.[4] 이후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살 것을 결심했다. 그러다가 형인 이지번에게 '처가의 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禍(화)는 바로 1549년 4월에 일어난 이홍남의 고변이었다.[5] 이로 인해 정미사화에 포함되는 ‘이홍윤 옥사 사건’이 터진다.
이 과정에서 장인 모산수를 포함한 충주 지역의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는데, 당시 충주 지역이 "한 고을이 텅 비게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충주가 유신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라는 명칭이 청홍도라고 변경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6] 그 후 자신의 출생지인 보령과 거주지인 서울 마포를 근거지로 해서 전국을 유람하면서 민생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리했다. 그 후 그의 나이가 56세인 1573년, 유일(遺逸)[7]로 종6품직 관직에 제수, 포천 현감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자신의 상소가 무시되자 곧 사직했다. 1578년에는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걸인청(乞人廳)을 세우는 등 백성 구휼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野史(야사)에는 기록하기를, 죽기 얼마 전 백성들을 착취하다가 이지함에게 발각된 아전이 있었는데 주변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이지함이 가볍게 처벌하는 등 덕을 베풀었지만, 오히려 당해 아전은 이지함에게 앙심을 풀고 이지함의 죽음에 크게 관여했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죽어야할 자는 운세대로 必시 죽여야한다라는 철칙이 성립한다. 지병이 악화된 이지함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지네 즙을 먹고 그 독소를 해소하고자 생밤을 찾았는데 이 아전이 의도적으로 나뭇조각을 밤처럼 깎아서 바쳐 이를 모르던 이지함이 독살 당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는 죄지은 아전의 상투를 풀어 총각처럼 땋은 머리를 하게 하는 모욕을 주었다가 그 아전이 지네 즙을 몰래 술에 탄 것에 당했다고 좀 다르게 나온다. 개인적인 견해로 냉정하게 이지함을 평가하자면, 시대를 잘못 타고났고, 개인적으로 유능하지만 자신의 포부를 사회에 제대로 풀어보지 못하고 귀천세한 희대의 풍운아였다고 본다. 사주팔자로 이해하자면, "제살태과에 불봉재관 대운을 타고난 팔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 甲子士禍 :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폐비(廢妃) 윤씨와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 연산군의 생모 윤 씨가 폐위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죽은 일에 관계한 신하들과 윤 씨의 복위(復位)를 반대한 사람들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화(禍)를 입었다.
★ 土亭祕訣 : 조선 명종 때에 토정 李之菡(이지함)이 지었다고 하는 일종의 도참서. 태세ㆍ월건ㆍ일진 따위를 옛날 중국 명나라 당시 철학자 邵康節(소강절) 선생님의 주역 상수로 변환하여 따지고, ≪주역≫의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일 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데에 쓴다.
★토정 이지함 : 조선 선조 때의 학자(1517~1578). 자는 형중(馨仲)ㆍ형백(馨佰). 호는 토정(土亭)ㆍ수산(水山). 벼슬은 포천(抱川), 아산(牙山)의 현감을 지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의약ㆍ복서(卜筮)ㆍ천문ㆍ지리ㆍ음양오행 이론에 능통하였다. 저서에 ≪토정비결≫ 등이 있다.
★ 음양오행설(음양오행설) : 우주(宇宙)나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現象) 및 만물(萬物)의 생성(生成) 소멸(消滅)을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소장(消長), 변천(變遷)으로 설명하려는 이론(理論).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각각 성립된 음양설과 오행설이 한(漢)나라 때에 합쳐진 세계관(世界觀)으로, 특히 역법(易法)과 결합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 民間(민간)과 士大夫(사대부)의 일상생활(日常生活)에 큰 영향(影響)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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