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한국군이 영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했던 사건
1950년 12월 15일 오전 7시30분..
서울 북쪽 홍제리에서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 경비병들이 수감자 34명을 사살했다.
모두 5명의 경비병들은 전날 미리 파둔 구덩이에 수감자들을 무릎 꿇린 뒤 사격을 시작했다.
경비병 수가 적다보니 구덩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아야 했고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수감자에겐 집중사격을 가했다.
공포에 질린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 수감자들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전쟁의 동란속에서 강력한 정보통제가 이뤄지던 이러한 참상들은
소문만 무성할뿐 공식적인 논란으로는 비화되지않고있었다.
그러나 이 범죄현장은 패망직전에 놓여있던
한국을 돕기위해 파병온 영국군인들에 의해 발각되고만다.
이곳은 영국군 29여단 관할지역이어서 모든 장면이 영국 군인에 의해 목격됐다.
윌리엄 힐더(William Hilder)와 렌 캐일번(Len Calebourne) 등 영국 군인들은
'여자 2명과 8살,13살 된 어린이 2명이 함께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이건 학살이야! 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거야?'
충격을 받은 영국 군인들은 그날 아침도 먹지 못했다.
여성들과 어린이같은 약자들에대한 집단학살은
나치독일을 연상시키는 깊은 트라우마였으며 역겨운 범죄행위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내일 이곳에서 35명을 또 사살할 것'이라고 말했던 경비병들이
실제로 다음 날 해뜨기가 무섭게 수감자들을 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참다 못한 영국 군인들은 경비병들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킨 뒤 구덩이도 되묻게 했다.
공산진영의 침공으로부터 약소국인 한국의 자유를 지켜주겠다는
대의명분하에 이역만리 타국에 파병왔던게 아니었던가.
영국의 젊은청년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에 충격을받고,
동맹군병력을 무장해제시키는등 이례적인 실력행사에 나섰다.
심지어 현장의 영국군병력들의 항의는 점차 유엔군 사령부와
외신들에까지 흘러가게되면서 이 사건은 점차 국제문제화되었다.
동맹군의 민간인학살행위에 분노한 영국군의 거센 항의로 사건이 확대되자
유엔한국통일재건위원단(UNCURK)은 사실 확인을 위해 시신 발굴에 들어갔다.
그 결과,현장에선 전날 사살된 34명이 아닌 수백구의 시신이 쏟아져 나왔고 여자 시신도 상당수 발견됐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찾아내지 못했으며,한국 정부는 어린 아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후 학살 책임자였던 국군 대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정부는 학살 중단을 지시했다.
그러나 1999년 미국정부의 기밀해제로 드러난 보도연맹 학살관련 보관사진자료들중에는
청소년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사진또한 발견되었다고한다.
미군이 당시 작성한 공문에 따르면 영국군은 홍제리말고도
다른지역에서도 국군의 전범행위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또 1950년 12월 12일 유엔사령부가 미 8군에 보낸 공문에는
한국 경찰이 황해도 신막에서 주민 21명을 총살하려는 것을 영국군이 저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신막의 얼어붙은 강변에서 경찰이 주민을 사살하려 하자
영국 45 야전연대 마틴 홀(Martin Hall) 대위가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홀 대위의 연락을 받은 여단본부 버틀러 윌리암(Butler Williams) 대위는 경찰 책임자를 찾아가
'학살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네놈들을 총으로 쏘아죽이겠다'고 한국경찰을 위협,주민들을 풀어줬다.
다음날 경찰에 붙잡혀 있던 100여명이 추가로 풀려났다.
한국군에 의한 보도연맹원 살상은 당시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에게도 보고되었다.
AP통신은, 비밀해제된 미 국방부 등 1급 비밀문서를 인용하여,
한국군에 의한 대량학살사건이 당시 한국군을 사실상 지휘하던 미군 고위층에도 보고돼
맥아더 사령관도 알게 됐으며 맥아더 사령관은 무초 주한대사에게
‘적절한 처형’인지 살펴볼 것을 주문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무초 대사는 한국정부에
이를 ‘불법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처형’으로 규정하며 이를 항의했다고 한다.
-끝없는 템즈강의 물은 도도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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